나이가 들수록 여행은 쉼이 됩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저에게 여행은 더 이상 '어딘가를 향한 바쁜 발걸음'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행은 '제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이들과 온전히 함께하는 쉼의 시간'이 됩니다. 특히 제주는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만, 여름의 뜨거운 열기나 휴가철의 북적임을 살짝 비껴간 시기에 방문하면, 그야말로 진정한 자연의 숨결과 고요한 평화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제주 여행은 제주의 동쪽 끝, 섭지코지에서 시작하여 숨겨진 자연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급하게 이동하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조급해하기보다, 한곳에 머물며 충분히 자연과 교감하고, 맛있는 음식을 음미하며 깊은 사색에 잠기는 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1일차 & 2일차: 섭지코지에 머물며, 파도 소리에 젖어들다
제주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렌터카를 인수하고, 이번 여행의 주무대이자 쉼터인 섭지코지 방면으로 향했습니다.
서둘러 구경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대신, 섭지코지 인근에 있는 숙소에 여장을 풀고 이틀간 이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섭지코지는 유려한 해안선과 검붉은 현무암, 성산일출봉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절경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특히 신양섭지해변은 물색이 맑고 잔잔해서 고요히 걷거나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기에 그만입니다.
저는 가족과 함께 해변을 거닐며 조개껍데기를 줍고,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를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후에는 해안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세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니, 가슴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올인' 촬영지인 올인하우스나 성산일출봉의 웅장한 모습도 물론 좋았지만, 섭지코지의 진정한 매력은 아무도 없는 한적한 해변에 앉아 그저 바다를 바라보는 데 있었습니다.
찰싹이는 파도 소리는 더없이 편안한 자장가가 되었고, 때로는 삶의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조용히 건네주는 듯했습니다.
바다의 기운이 살아있는 한 끼: 섭지코지 인근의 '옥돔식당'과 갈치국
섭지코지에서의 이틀 중 하루 저녁, 우리는 섭지코지와 성산일출봉 근처에 있는 옥돔식당을 찾았습니다.
화려한 인테리어보다는 왠지 모르게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아늑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곳은 옥돔 구이나 갈치조림도 유명하지만, 특히 저는 갈치국을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맑은 지리에 가까운 갈치국은 처음엔 다소 생소했지만, 한 숟가락 떠먹는 순간 그 진하고 시원한 맛에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뽀얀 국물 속에는 투박하게 썰어 넣은 무와 배추, 그리고 무엇보다 싱싱한 갈치 토막이 넉넉하게 들어있습니다. 국물은 전혀 비리지 않고, 오히려 무에서 우러나온 달큼함과 채소의 시원함이 갈치의 담백한 맛과 어우러져 깊은 풍미를 자랑합니다. 보드라운 갈치 살을 발라 흰쌀밥에 올려 먹으면 씹을 새도 없이 스르륵 녹아내립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본연의 맛을 살린 담백한 음식을 찾게 되는데, 옥돔식당의 갈치국은 그런 저의 입맛을 완벽하게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제주 바다의 정직하고 시원한 맛을 느낄 수 있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제주의 맛이었습니다.
3일차: 숲 속의 평화, 교래자연휴양림에서의 하룻밤
섭지코지에서의 여유로운 2박을 마친 후, 제주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나기 위해 한라산 중산간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머물 곳은 해변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지닌, 교래자연휴양림입니다.
- 추천 장소와 추천 이유: 제주 유일의 곶자왈 지대에 위치한 자연 휴양림으로, 빼어난 숲길과 삼나무 숲이 장관을 이룹니다. 울창한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는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며, 흙길을 걷는 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 속에서 온전히 걷는 것이 얼마나 큰 치유가 되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이곳은 인파를 피해 조용히 자연을 느끼고 싶은 분들께 최적의 장소입니다.
- 그 주변 반드시 들려야 할 맛집: 휴양림 근처에는 토종닭 샤브샤브나 닭백숙 전문점이 많습니다. 숲 속에서 만나는 건강하고 담백한 별미는 자연에서의 하룻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4일차: 신비로운 동굴의 속삭임, 제주의 과거를 마주하다
제주 숲 속에서의 상쾌한 아침을 맞은 후, 이번에는 제주의 지하 깊은 곳에 숨겨진 신비로운 풍경을 찾아 나섰습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만장굴입니다.
- 추천 장소와 추천 이유: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동굴 중 하나로, 거대한 스케일과 함께 형성된 다양한 용암 지형은 자연의 위대함에 저절로 경외심을 느끼게 합니다. 동굴 안은 여름에도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여 색다른 경험을 선사하며,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에서 과거 화산 활동의 흔적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싸입니다. 다소 습하고 어두운 환경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흔히 접할 수 없는 독특한 경험을 원하는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
- 그 주변 반드시 들려야 할 맛집: 만장굴 근처에는 제주의 명물인 보말 칼국수나 해물 파전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있습니다. 동굴 탐험으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우기에 좋습니다.
5일차: 다음 쉼을 기약하며
4박 5일간의 제주는 쉼과 사색, 그리고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습니다. 익숙한 바다에서 깊은 평화를 얻고, 숨겨진 숲과 동굴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마주했습니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마지막으로 제주시내에 있는 동문시장에 들렀습니다. 이곳은 현지인들의 활기찬 삶을 엿볼 수 있으며, 제주의 신선한 해산물과 특산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습니다. 갓 잡은 싱싱한 회 한 접시와 오메기떡, 그리고 귤 한 상자를 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래봅니다.
제주는 살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젊었을 때는 해외의 유명한 곳들을 찾아다니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제주의 푸른 바다와 숲 속을 거닐며 느끼는 소박한 행복이 그 어떤 화려한 경험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시간에 쫓기지 않고, 그저 자연 속에 몸을 맡겨 자신을 돌아보는 것. 이보다 더 값진 여행은 없을 것입니다. 제주는 이제 저에게 단순한 여행지가 아닌, 삶의 깊이를 더해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제주에서 자신만의 진정한 '쉼'과 '사색'을 만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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